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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

by PickUp 202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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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궁궐은 임금이 사는 집이면서, 정치행위를 펼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을 5대궁이라고 부르는데,

‘임금께서는 천년만년 사시고, 큰 복을 누리셔 만수무강 하옵소서’ – (군자만년 개이경복)

 

<시경>의 구절 중, ‘경복’ 두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경복궁은 궁에 거처하는 왕이 큰 복을 누리길 바라며 지은 이름이지만, 정작 조선의 왕들은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의 왕들이 ‘경복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복궁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설계한 궁인데, 여기서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담아 궁궐을 설계한다.

 

정도전의 ‘이상’은 당시로서는 정말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 정도전 <삼봉집> 中 –

 

정도전은 민본주의. 즉,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정도전은 임금보다 백성을 소중히 여기던 마음으로 왕의 공간인 궁궐도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설계를 한다.

나라의 왕으로서 왕은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 했기에 ‘업무 공간’을 강조해서 경복궁을 만든다.

 

때문에 경복궁은 왕과 신하들이 일하는 공간인 ‘외전’이 왕실 가족의 거주 공간인 ‘내전’보다 클 정도이다.

또 ‘왕이 지켜야 할 의무’를 전각의 이름으로 붙였는데,

 

정책을 구상하는 공간인 ‘사정전’에는 ‘깊이 생각하며, 정치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책을 실현하고 행정을 집행하는 공간인 ‘근정전’에는 ‘부지런히 정치하라’는 뜻이 담겨 있으며, 왕의 침실인 ‘강녕전’에는 ‘몸과 마음을 건강히하고, 편하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게다가 강녕전은 우물 정자(井)모양으로, 그 가운데를 왕이 사용하고 주변에 있는 작은 방들에 상궁과 나인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기에 왕의 휴식공간이나 다름 없는 ‘강녕전’에서도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경복궁에서는 왕 개인이 사생활(!)이란 존재하기 어려웠던 구조..

 

그래서 조선의 왕 대부분은 무게감을 느끼게 했던 경복궁보다는 편안하고 아름다움을 선사해주는 ‘창덕궁’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런 무게감을 줬던 경복궁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왕이 있었으니.. 그는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

재위 32년 중, 대부분의 기간을 경복궁에서 지낸 세종은 머무는 동안 경복궁을 새롭게 단장하기도 한다.

세종은 경복궁 전각 대부분을 수리하고, 새로 건물을 짓고, 이름이 없던 공간에는 이름도 지어줬는데,

 

그 이름이 바로 ‘광화문’

1395년(태조 4년) 9월 경복궁이 건설될 때 처음 지어졌는데, 원래는 그냥 정문이라고 했다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개칭된다.

그리고 경복궁의 의미와 닮은 인생을 살았는데.

근정 – ‘부지런히 정치하라’

오전 5시 기상

오전 6시 아침 공부

오전 7시 아침 식사

오전 9시 업무 보고 및 오전 회의

오전 11시 30 분 점심식사

오후 1시 낮 공부

오후 3시 상소문 검토 및 잡무 처리

오후 6시 저녁 공부

오후 7시 저녁 식사

오후 8시 야간 공부

오후 10시 취침

사정 – ‘생각하고 정치하라’

일생동안 1,835회 이상의 강연(임금이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을 주재하면서 부지런히 신하들의 의견을 묻고 경청

광화 – ‘임금의 뜻이 널리퍼지다’

백성과 소통하며 백성을 위한 ‘애민정치’를 펼쳤던 세종.

역사상 최초로 17만명 대상 ‘여론조사’를 진행

그리고 임금의 뜻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최고의 발명품인 ‘훈민정음’창제

경복궁이 주는 위압감을 이겨내고 최선의 정치를 펼친 한국사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 세종실록 (1441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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