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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조선시대 조정에서 논의된 미스터리 사건

by PickUp 2017.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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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정에서 논의된 미스터리 사건]


조선시대에 정식으로 조정에서 논의된 사건 중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꼽는다면 1530년대를 무렵에 일어난 어린이에 대한 살인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531년 남대문에서 문안에서는 이상한 자루가 내던져진 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자루를 열어보니 안에는 10살이 조금 넘은 여자아이가 목이 잘려서 자루속에 담겨 있었다.

 

발견된 여자아이의 머리를 보면 귀고리를 한 모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한성부 판윤 윤은보는 시체를 검사해 본 결과 살인하여 죽은 시체인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그냥 땅에 묻어 버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러는 사이에 사건은 영원히 잊혀져 버렸다.

 

1533217.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귀성(金貴成)의 집이자 무당의 집 뒤의 거리에 5~6세된 여자 어린아이 한 명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아이가 발이 잘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이를 발견한 김귀성은 황급히 아이를 구조하여 관청에 보고했는데, 어린아이는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의 이름은 "개춘(開春)"이라고 했고, 자신의 오빠가 있는데 그 이름이 "어리가이(於里加伊)"라고 했다

아이에게 발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저 "칼로 내 발을 잘라내면서, 죽어라, 죽어라고 했어요"하고 대답했다.


 

조사를 진행하자 한덕(漢德)이라는 종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덕은 자신의 주인 집에 가다가 하반신에 동상이 걸린 아이를 발견했는데, 아이가 불쌍해 보이고 마침 자신에게 아이가 없기에 데려가서 보살폈다고 했다

그러나 한덕의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집안에 들여 놓을 수 없으므로 쫓아내라고 하기에 다시 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한덕이 이후의 소식을 들어보니, 그 이웃 중에 궁궐 출신의 어느 집에서 데려갔다가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 후에는 김별좌(金別坐)의 종인 연수(連守)가 다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한덕은 아이가 발이 잘린 이유는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조사 중에 중덕(仲德)이라는 종이 또다른 주장을 펼쳤다. 발견된 아이는 옥가이(玉加伊)라는 아이로,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중덕은 지난해 929일에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5개월 만에 문득 알 수 없는 아이가 발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본 즉,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 아이는 조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던 한덕이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었다.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한성부에서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직접 도대체 누가 발을 자르며 죽이려 했는지 물었다

그때 한덕이 아이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아이는 죽을 먹다 말고 죽을 먹여주고 있는 한덕을 바로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내 발을 잘랐어요"하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이 발을 잘릴 때 털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했으므로, 한성부에서는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사람들을 각기 털모자를 씌운 모습으로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그 때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이는 여기에는 실패했다. 


이후 의금부의 담당자들이었던 유보(柳溥)와 심언경(沈彦慶)이 직접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이에게 무엇으로 발을 잘렸는지 물었고, 아이는 "칼이요." 하고 답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방 안에서" 라고 답했다. 언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낮에"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아이 앞에 한덕과 중덕 두 사람을 동시에 데려와서 누가 발을 잘랐는지 물었는데, 그러자 아이는 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에요"하고 답했다. 아이는 "두 손을 묶고,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내 발을 잘랐어요"라고 답했다.


 

아이의 발을 자른 범인은 한덕으로 굳어지는 듯 했으나, 사람들 간에 몇가지 석연찮게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무당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라든가, 아이가 동상에 걸려 있어서 발이 썩어서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점들이 의심스러운 점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최고의 의원들에게 아이의 발이 잘린 자리를 관찰하게 하여 썩어서 발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잘려 나간 것인지 조사하게 하기도 했으나, 어린아이의 말만으로는 큰 죄를 속단할 수 있는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쪽으로 맺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아이의 말이 나이에 맞지 않게 일관되어 있고 정리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히 묻혀 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산 속에서 몰래 살인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한 뒤에 몰래 종으로 삼아 노비로 기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점이 문제거리로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사건들을 이후에도 벌어졌다. 1546년에는 아직 어린 여자와 두 세살 바기 아기의 시체가 서울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이 발견되었다

시체는 온몸 이곳저곳이 불로 지진 참혹한 상태였고, 특히 아랫배와 배꼽 주위를 마구 지져 놓은 모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체를 발견한 집에서 다른 곳으로 몰래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정도가 더 조사되었을 뿐

이후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이 미스터리 한 사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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