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파로 불리는 아베가 친한파였다고?
과거 '친한파'였던 아베??
2006년 아베 신조 vs 2019 아베 신조에 대해서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출생
앞서 아베의 가족사는 좀 특이하다.
그의 할아버지 아베 간은 제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서 "전쟁 반대"를 외치던 군국주의에 비판적인 평화주의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군국주의 최전선에 있던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다.
아베 간의 아들이자 이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평화주의 정치가 였고, 제국주의 일본의 과거사를 청산하고 싶어했던 정치인이었다.
아베 신조는 대학 졸업 후 회사원으로 일하다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 아버지가 유력한 총리 후보였으나 암으로 인해 1991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지역구에 출마에 국회에 입성한다.
이후 아베는 일본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로 집권을 한다.
아베가 이런 기록을 세우며 총리로써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을 말하자면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北朝鮮による日本人拉致事件)이 있다'
이 사건은 북한이 20대 남녀 일본인을 대상으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벌인 납치사건이다.
당시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의원의 비서였던 아베는 자민당 본부를 찾아온 납북 피해자 부모들 응대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며 '납북피해자 가족회'를 발족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이 크게 이슈되지 않았고, 자민당 내에서도 이런 문제를 신경 쓰는 아베는 동료 의원사이에서 비웃음 거리가 되기도 했다.
"국회의원은 도쿄, 와세다, 게이오 대학을 나온 수재만 해낼 수 있는 직업이다. 세이케이 대학 같은 삼류 대학 출신은 아베 신조밖에 없다. 아베는 경제나 사회 문제같이 어려운 분야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납치문제라는 정체 불명의 문제에만 열심히 매달리고 있다"
이런 비난에도 아베는 납치문제에 열성을 보였고,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발족되면서 관방장관에 임명 된 아베는 2002년 '납치의혹 프로젝트팀'을 만들었다.
*관방장관은 총리 비서실장 겸 내각 대변인으로 정치세력의 차세대 에이스들이 임명되는 자리
그리고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됐는데, 이때 아베 신조는 북·일 정상회담에서 '납북자 문제'를 꼭 해결하겠다는 다짐으로 북한으로 향한다.
여기서 북·일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최대 공로자는 다나카 히토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그는 중국에서 북한과의 극비 협상을 30회 가까이 반복하면서 회담을 이끌어 냈는데, 그의 성향은 '대북 유화파'.
다나카 국장은 '북한에게 무력 사용과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북 강경파'인 아베 신조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던 사람으로 그는 '북·일 평양선언'초안을 보여주지 않다가 방북 당일에서 보여주는데, 아베는 '납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선언서에 분노한다.
*북·일 평양선언은 1999년 북한이 추진한 것으로 첫째 '일본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책전환을 한다' 둘째 '일본이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과거의 모든 죄행에 대하여 사죄하고 보상한다'는 내용이 핵심으로 불미스러운 과거사를 청산하여 정치,경제,문화적 관계를 수립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엎친데 덮친격 회담 직전에는 북한으로 부터 '일본인 5명 생존, 8명 사망'이라는 종이를 건네 받는다. (일본은 12건의 납북으로 17명이 납치됐다고 파악했으나, 북한은 13명만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회담에선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당연히 사과도 없었고, 분노한 아베는 고이즈미에게 "평양선언에 서명하지 말고 귀국하자"라며 다그친다.
이로 인해 대북 유화파인 다나카 국장과 싸움 직전까지 갈 정도로 충돌했고, 김정일도 이 문제를 의식한 듯 오후에 다시 열린 회담장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고 변명을 하며 사과한다.
"일본인 납치한 것은 북한의 특수기관 내 일부 공작원들이 '`영웅주의'에 심취한 일부에 의한 행위... 내가 알고 나서부터는 이를 주도한 관계자들을 전부 처분했다"
이는 김정일이 국제사회에 사과를 한 최초의 사건이 된다.
한편 북한 문제 하면 '핵 개발', '미사일 개발'이 급선무이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납북 피해자들을 자기 가족처럼 여기며 슬퍼했기에 일본에서는 북한의 핵, 마시일 보다 납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였다.
이러한 문제를 아베 신조라는 젊은 정치인이 해결했기에 이 사건으로 아베는 일본 국민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지금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담으로 다나카 국장은 국민의 거센 비난을 받고 눈물의 변경을 하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자신의 후계자로 아베를 지명하며, 2006년 21대 자민당 총재에 당선. 그리고 다수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일본의 관례에 따라 90대 일본 총리에 오른다.
당시 아베는 고이즈미의 행동과는 정반대인 행동을 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는데,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서늘해진 한일관계, 중일관계 회복을 위해 정상회담을 여는 등 상당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한국의 국립현충원에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아베에게 위기가 닥친다. 내각의 각종 비리로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고작 37석밖에 확보하지 못한다.
이는 1989년 36석을 확보한 참의원 선거 이후 최악의 성과를 낸 그야말로 참패다.
내각의 스캔들 문제에 건강상의 문제까지 겹쳐 아베는 단 1년 만에 사퇴한다.
사퇴 이후 요양하던 아베는 2008년부터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했으며, 2009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에 다시 당선되며 총리 재임을 노린다.
아베는 총리 재임을 위해선 우익적인 성향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였을까.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더니, 간 나오토 총리(민주당)가 식민지배의 강제성과 폭력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간 담화'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며 우익 지지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또 2012년 8월 14일 이명박의 일왕 사과 요구 사건에 대해서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자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극우 스탠스를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이명박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독도를 방문했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일본 내각을 향해서 사죄요구를 한 적이 있지만 일왕을 직접 겨냥한 사죄요구는 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다.
이명박은 또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독립운동을 하다 순직한 독립운동가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하고 과거사를 반성한다면 일왕의 방한을 허용하겠다"는 말을 하며 일본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가한다.
일본 내에서는 일본 공산당 조차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얘기가 나올정도로 거세게 반발했고,
과거사 사죄를 요구하는 한국과 이를 부정하는 일본의 관계는 싸늘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스탠스를 보이던 아베는 2012년 자민당 총재로 당선. 이후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32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총리로 취임한다.
이렇게 총리가 된 아베. 그는 당선되자마자 '센카쿠 열도는 일본땅'이라고 발표하며 중국을 자극하더니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수상 임기 동안 계속 하겠다. 지난 총리 재임 시절에 참배하지 않아 매우 한스럽게 생각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2013년에는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승리하며 일본 헌법 9조 '군대 보유와 전쟁 금지'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더니
태평양 전쟁 책임자들을 재판한 '도코재판'에 대해 "승자의 판단으로 단죄한 재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총리 최초로 자위에 전차에 타더니 731번호가 찍힌 비행기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는 도발을 선보인다.
중국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즉각 반발했고, 한국도 메르켈 총리가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달린 비행기를 타는 것과 같다며 맹비난했다.
아베는 또 주권 회복의 날 행사를 강행하며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고 말하더니 공적인 자리에서 금기시하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다.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행사장을 빠져나가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아베 내각은 친미-반한,반북,반중 정책을 펼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해선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다가 이를 삭제했으며
독도 문제, 과거사 문제 등 여러 논쟁들에 대해 기존 입장을 고수하며, 현재는 광복 이래 역대 최악 한일관계가 되었다.
한때 평화주의를 외치며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여 친한파로 분류된 아베지만
한 번의 실패 그리고 일본의 정통 보수가 몰락하고 극우파가 장악한 일본 내각.
아베는 장기 집권을 위해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극우파를 결집하고 극우노선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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