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자금'을 지원한 기업들

by PickUp 2020. 5. 28.
728x90
728x170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자금'을 지원한 기업들

<유한양행>

유한양행 초대 창업자 유일한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나 조국 현실에 눈뜨고 14살에 조국 독립을 위한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 자원입대한다.


1919년 24살 대학생이던 그는 한인 대표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결의문을 낭독했으며

1926년에는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 민족기업으로 성장시킨 후 1938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재미 한인들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로 침투시켜 정보 수집, 폭파 등 무장 유격활동을 전개하는 OSS의 냅코작전에 지원했는데, 해당 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강도 높은 군사, 첩보 훈련을 받았다.

 

 

 

 



이런 작전에 지원한 유일한의 나이는 50살. 이 작전이 실제 실행되기 전 일본이 패망하면서 실제 실행되지는 않았다.

유한양행의 독립운동정신은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5년 연속 선정되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로 1936년 대한민국 기업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했으며 유일한은 본인 소유 주식 52%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또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약 1,173만 원)를 제외한 전 재산 407억 원을 기부한다. 이때 당시는 쌀 한 가마에 8,000원 하던 시절이니 현재의 407억보다 가치가 훨씬 높다.

하지만 유일링의 아버지이자 유일한의 아들인 유일선은 이 1만 달러를 거부하다가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기부했다.

유일한은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동화약품>

1897년 구한만 시절, 궁중 선전관 출신 노산 민병호와 그의 아들 민강 등이 대한민국 최초 신약 활명수를 출시, 국내 최초로 상표등록을 하며 대한민국 제약업계에 뛰어들었다.


이후 민강 선생은 동화약품을 설립했는데 활명수 등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의 갖은 탄압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중 붙잡혀 두 차례에 걸친 옥고로 인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다.

민강 선생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육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월급을 주며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민강 선생은 제약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건강에도 힘을 썼으며 벌어들인 수익을 전부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도 힘을 썼다.

<교보생명>

 

교보생명그룹을 창립한 신용호 회장의 가족은 독립운동집안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 신예범 선생은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민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민란의 중심에서 활동했고 이 때문에 7년 옥살이를 했다. 풀려나서도 요주의 인물로 찍혀 마을에 정착할 수 없었고 결국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대를 떠돌아야 했다.

이로 인해 신용호 선생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신용호 선생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독립운동에 나섰다.

첫째 형 신용국은 호남에서 항일운동을 이끈 독립투사, 둘째 형 신용율은 일제소작쟁의를, 셋째 형 신용원은 군국주의 찬양가를 거부해 고문을 받은 항일음악가, 넷째 형 신용복은 일제 때 민족계 보험회사인 조선생명 지점장을 지냈다. 너무 어렸던 막내를 제외하고는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가족 모두 독립운동에 나서 집안 생활이 어려워지자 신용호 선생은 '나라도 돈을 벌자'고 생각해 중국으로 떠나 사업을 시작. 만주에서 '북일공사'라는 양곡수송회사를 설립해 큰돈을 번다.


여기서 이육사 시인과 친분을 맺기도 했으며 민족 자본을 키워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만주에서 번 돈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신용호 선생은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학업을 포기한 채 독립운동에 힘썼지만 여전히 책을 사랑했으며, 이후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는 것이 대안이라는 답을 내리면서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한다

당시 20대 이상 성인남녀 열의 여덟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신용호 선생은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가입하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보험을 권유했다.

 

 

 

 



실제 그가 만든 교육보험은 자녀가 진학하면 보험료 전액을 돌려주는 형태로 어려운 가정에서도 학생들이 진학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방식이었다.

 




 

728x90
그리드형
LIST

댓글